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8월 미국일기: LA 한복판에서 쓰러짐

다음 신호를 느긋이 기다렸으면 될텐데 시간을 아껴보겠다고 달린 것이 화근이었다. 가주마켓 맞은 편 도보에서 넘어지면서 발을 접질렀다. 처음에는 발이 몹시 아팠지만 심각한 통증은 아닌 것 같았고, 쪽팔림이야 있었지만 초록불로 바뀌면 어차피 시야에서 사라질 차들이니 개의치 않았다. 문제는 내가 발목 접질림 같은 통증이 있을 때 정신을 잃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다음 신호를 기다리다보니 시야가 희뿌옇게 갉아들었다. 이번에도 쓰러지면 벌써 네 번째 실신이니 무엇을 해야 할지 이제는 익숙했다. 앉을 곳이나 누울 곳을 찾아야 했다. 누가 내 곁을 스칠지 모르는 낯선 이국 땅에서 눕긴 꺼려져서 신호등 옆 초록 벤치에 걸터앉았다. 건너편 가주마켓 간판을 처음에는 읽을 수 있었지만, 앉아있을수록 시야가 점점 혼탁해져 결국엔 그 큰 글자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 정말 쓰러지는 건가, 쓰러진 사이에 누가 날 데려가면 어떡하지, 재수 없게 누가 의식 없는 나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비자가 시작하기도 전인데 응급실에 가서 병원비 폭탄을 맞으면 어떡하지. 위험한 상황임에는 틀림 없지만, 워낙 겁도 많은 터라 머리 속에는 온갖 걱정들이 부풀기 시작했다.

 

앉아있어봐야 시야만 흐려지니 햇빛이라도 피하겠다는 마음으로 일어서서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다음 기억은 위에서 걱정스레 나를 내려다보는 한국인 두 분과 오른쪽 이마에서 느껴지는 둔한 통증이었다. 아무래도 일어선지 얼마 되지 않아 땅에 쓰러졌고 그 과정에서 이마를 부딪친 것 같다. 두 분은 매장 밖에서 큰 소리가 났다면서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시고 시원한 물 한 잔을 내주셨다. 도저히 맑은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그 혼란한 와중에 감사하다고 말씀은 드렸던 것 같아 다행이다.

 

내가 쓰러진 지역이 LA의 더 위험한 곳이 아니라 대낮의 한인타운이라는 점, 그리고 친절하신 분들이 있는 한인 점포 바로 앞에서 쓰러진 것은 다시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었다. 집에 돌아온 지금은 발목이 생각보다 아파서 병원비 폭탄을 걱정할 뿐이다. 냉찜질 하면 나아지겠지.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여행 중에 먹었던 포춘 쿠키에 시작이 가장 어려울 것이라더니 여러모로 어렵긴 하다. 그렇지만 오늘 아침에 청강한 개발경제학 첫 수업에서는 좋은 분들을 만난 것 같으니 한편으로는 좋은 출발이다. 정확한 전개는 모르지만 머리를 크게 다치지 않은 것도 무척 감사한 일이다. 조금만 더 몸을 쉬고 리딩하다가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