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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글

8월 미국일기: LA 바퀴벌레 퇴치하기

 

8월 16일 미국에 당도한 후 곧바로 바퀴벌레와의 동거를 시작했다. 집 열쇠를 받아 처음 들어가보니 냉장고 주위에 벌레 시체와 미끈미끈한 알들이 즐비했다. 앞으로 벌레와 함께할 나의 미래가 너무 훤해 속이 울렁거렸지만, 어쨌든 바닥을 모두 닦고 냉동실을 열었더니 그곳에도 죽은 벌레들이 이십여 마리 있었다. 관리인은 분명히 청소와 해충 처리를 했다고 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곧이은 나의 캐년 여행 기간동안 해충 처리를 한 차례 더 부탁하였다.

 

자이언 캐년과 브라이스 캐년을 모두 돌고 삼일 만에 돌아온 날에 또 다시 마룻바닥과 냉동실 안에 벌레 시체들이 있었다. 해충 처리의 잔여물일 뿐이라고 애써 믿으며 반나절 동안의 대청소를 감행한 후 Combat의 바퀴벌레 미끼를 부엌 곳곳에 두었다. 그날 밤 웬 커다란 바퀴 한 마리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내 책상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향했고 내 기분은 몹시도 처참했다.

 

8월 25일 현재는 처음보다 상황이 나아진 편이다. 우선 영문모를 시체들이 바닥에 생기지는 않으며 며칠 간은 냉동실에 더 이상 벌레가 나타나지 않아 이제는 부엌에서 요리도 한다. 나의 집에는 이제 못해도 다섯 개의 바퀴벌레 퇴치용품이 생겼다. 혹시라도 나처럼 바퀴벌레 둥지에 월세 계약을 한 가엾은 사람이 또 있을 수도 있으니 이곳에 내가 무엇을 해왔는지 기록한다.

 

1. 이중창 막기 Duct tape

 

아빠와 함께 LA에 오게 되어 천만다행이었다. 책상 위를 기어가는 커다란 바퀴를 보고 거의 삶의 의지를 잃었을 때 우리 아빠는 나를 몹시 한심하게 생각하셨다. 저렇게 커다란 벌레는 당연히 외부에서 들어올 수 밖에 없을 거라면서 집안 구석구석을 찾더니 기어이 창문과 방충망 사이에 있는 꽤 큰 구멍을 발견하였다. 창문의 구멍들을 테이프로 막은 후부터는 그만큼 큰 벌레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테이프로는 검정색의 고릴라 테이프를 사용하였는데, 추후의 제거가 걱정되긴 하지만 접착력은 내가 본 어떤 테이프보다도 더 무지막지하다. 이중창 외에도 바닥에 의심스러운 틈이 보이면 막아두었다.

 

2. 스프레이 Raid Ant & Roach Killer (Lemongrass extract)

 

가장 처음으로 구입한 물품이지만 잘 쓰지 않는다. Lemongrass향 퇴치제는 처음 써보는데 냄새가 여간 독한 것이 아니다. 아이들과 애완동물이 있을 때 사용해도 안전하다고 광고하긴 하지만, 부엌에 조금 뿌렸더니 거실에 자고 있던 아빠가 냄새를 맡고 벌떡 일어나 나를 혼냈다.

 

3. 바퀴벌레 미끼 Combat Roach Bait

 

포장재를 열면 그리 쾌적하지 않은 과자 냄새가 코를 찌른다. 미끼로 바퀴를 유인하는 퇴치제로, 미끼를 먹은 바퀴는 얼마 안가 죽고, 이 미끼를 함께 노나먹은 다른 바퀴가족이나 그 시체를 먹은 다른 바퀴들도 죽는다. 끝내주는 도미노 효과를 기대하며 부엌 곳곳과 변기 뒤편에 놓았다. 처음 기대와는 달리 이 미끼를 치고나서 몇 시간 후에 오히려 바깥에서 커다란 바퀴가 들어오고 말았는데, 교훈은 이 미끼를 사용하려면 방충망에 바퀴구멍은 없는지 제대로 확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어쨌든 유인효과가 대단하다는 점은 배웠지만, 지금 내 집에서 시체로 발견되는 바퀴들이 이 미끼를 물어부린 놈들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4. 붕산 Harris Boric Acid

 

창문과 틈을 막은 뒤로 내 집에는 작은 바퀴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 Boric Acid (붕산)가루를 부엌 곳곳에 뿌린 뒤로 내가 본 모든 바퀴들은 몸을 까뒤집고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2번에 언급한 스프레이는 바퀴벌레에게 분사하는 즉시 바퀴벌레가 죽지만 (Kills on contact) 미끼와 함께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스프레이에는 벌레를 쫓는 성분이 담겨있어 그 강력한 유인효과를 상쇄하기 때문이다. 미끼와 함께 쓰기 적합한 것은 바퀴 덫 (Roach trap) 이나 바로 이 붕산이다. 해리스 사의 붕산에는 바퀴벌레를 유인하는 성분도 담겨있다. 붕산은 바퀴벌레를 바로 죽이지는 못하지만, 붕산 위를 기어간 바퀴가 죽어서 다른 바퀴의 먹이가 되면, 시체를 먹은 다른 바퀴도 죽는 도미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붕산을 만질 때 잠시 정신이 헤롱해지는 느낌은 있지만, 스프레이보다는 덜 독한 것 같다. 나는 냉장고 뒷편과 아래편, 오븐 아래편, 그리고 부엌 작업대 아래편에 붕산가루를 분사해두었다. 누가 우리집에 놀러오면 내가 먼지를 전혀 털지 않고 사는 줄 알겠지만 나는 만족스럽다.

 

5. 파리채 Swatter

 

스프레이가 미끼의 효과를 약화시킨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 바퀴를 물리적으로 가격할 수 있는 무기가 필요했다. 아마존에서 최대한 무게 있는 파리채를 구했는데 만족스럽다. 오늘 몸을 뒤집고 고통스러워하던 바퀴를 파리채로 편히 보내주었다. 익숙해지면 빠르게 달리는 바퀴도 명중시킬 수 있을 것 같다.

 

6. 규조토 Diatomaceous Earth Food grade 

 

냉동실에서 벌레의 향연을 목도하고 제정신이 아닐 때 주문하였다. 벌레는 죽이지만 내게는 유해하지 않은 마법같은 상품이 있을까 했는데, 있었다. 아직도 냉동실에 왜 벌레가 들어가는지는 미스테리지만, 창틈을 막은 뒤로 더이상 냉동실에서 벌레를 보지 않았기에 이 물건은 뜯지 않은 채로 장 속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이 물건은 음식 옆에 써도 괜찮기 때문에 대개는 부엌 선반에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7. 바퀴 모텔 Roach motel

 

미끼와 끈끈이가 결합한 상품이다. 벌레가 너무 싫은 내 새가슴으로는 붕산의 느긋한 속도를 견디기가 어려워서 오늘 저녁에 주문하였다. 이 상품의 캐치프레이즈는 Roaches check in but they don't check out! 으로 미끼 냄새로 바퀴벌레들을 유인해서 끈끈이 모텔에 고이 붙여드리는 상품이다. 아직 써보지 않아 효과는 잘 모르겠지만, 우선 캐치프레이즈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 외에 선배에게 추천받은 가스탄 개념의 Roach fogger가 있지만 집을 하루는 비워야 한대서 써보지 않았다.

 

하루 한마리 반죽음 상태의 바퀴를 보는 게 아주 못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매우 불쾌하다. 그래도 한 사람의 씩씩한 벌레 파이터로 성장한 것 같아 조금은 자랑스럽다.

 

아래는 재밌게 쓰인 바퀴벌레 퇴치글 (영문)

https://home.howstuffworks.com/home-improvement/repair/roaches-in-house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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